사람들은 내가 노숙자 선생님들이나 구걸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쓰면 그것을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듣는다. 어떤 사람은 그까짓 노숙자에게 오만 원 준 것이 무슨 대수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내용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이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리고 궁극적으로는 설득하는 것이다. 특히 내 일을 소재로 삼는 것은 내가 쓰는 글이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불행은 말로만 떠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닌가.나도 안다. 한 손이 하는
목사가 가지는 가장 잘못된 사고는 자신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 교회를 잘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생각을 해보라. 이렇게 하지 않는 교회가 과연 있는가?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사고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 역시 없다. 그래서 교회의 불행은 반복된다.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라는 사고가 불식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질 기미도 없다.나는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요리를 하고 아내는 그것을 먹은 후 뒷정리를 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뒷정리가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비교의식에 절어 있는 것이다.
어제 갑자기 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갑작스런 만남이었다. 대화 중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목사가 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목사는 유학을 마친 후 모진 고생을 했다.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목사의 고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잘 된 일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일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부러움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청빙을 받을 때가 지났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
최근 나는 이라는 글을 쓰고 그에 따른 글을 연속적으로 쓰고 있다. 최근 우리는 JMS나 얼마 전 죽은 이재록이나 아가동산과 같은 이단들의 이야기를 넷플릭스를 통해 확인하고 이단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넷플릭스도 신천지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아마도 그들이 가진 힘과 영향력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천지라는 이름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의 입구에 명시되어 있다.“신천지인들의 출입을 금합니다.”나는 이런 글을 써 붙여야 할 만큼 신천지가 골칫덩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오래 전 일이다. 한 수도원에서 가톨릭대학 교수인 신부님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나를 초대했던 신부님이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주셨다. 유무상통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결과적으로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설명을 듣고 교수 신부님은 “그러면 교단에서 목사님 월급을 주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개신교의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그분에게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리고 사실 그런 위험이 없이 가톨릭교회라는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신부님들이 부럽기도 했다. 실제로
“Shoot me first!(나를 먼저 쏘세요!)” 지난 11일 미국 휴스턴 남서부에 위치한 레이크우드교회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30-35세 사이의 한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로 들어왔다. 그는 긴 소총을 들고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소총을 난사했다. 때마침 그곳에 있던 비번인 경찰과 다른 기관 소속 요원 하나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여성이 함께 데려온 아이도 총에 맞아 위독한 상태이며 50대 남성 하나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 교회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대형교회로 으로 유명한 조엘 오스틴이 목사로 있는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경쟁의 체제에 돌입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인간은 이기는 것이 진리라는 세상의 복음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은 현실 그 자체다.손자가 지난 일 월 세 번째 생일을 지났다. 녀석은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열중한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자신의 관심을 표하곤 한다. 최근 녀석이 축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축구를 틀어달라고 하여 그것을 얼마간 보더니 빈 물병을 가져다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화장대를 골대라고 하면서 자신이 골키퍼라며 물병을 차라고 한다. 그러는 것이 신기해
적어도 3세기까지는 교회들 간의 어떤 조직이나 연합체 없이도 다른 교회들 간의 긴밀하고 친밀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 서로 얼마나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든지, 또 누구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개척된 교회든지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였다. 그들의 집회는 성도들의 가정이나 셋집, 혹은 야외에서 열렸으며 특별한 건물이 필요하지 않았다.서로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생명과 동일한 성령의 내주를 강조하는, 어떤 조직에 의해서도 서로 통제받지 않는 자율적인 통일성이
몇 년 전 박윤선 목사님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분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왔다. 나는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으로 어떤 생각이 옳으냐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따님은 아버지인 박 목사님이 일에 경도되어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고발을 한 것이다. 그 말인즉 아버지인 박 목사님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지적이었다.딸의 그런 지적과 그 지적이 담긴 책을 놓고 설왕설래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가족을
주님은 선교비와 구제비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을 모았는가로 당신의 몸인 교회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평가 자체를 받지 않는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세상의 그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누구도 그 사랑을 평가할 수 없다.그 사랑에 참여한 이들은 오직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그 부족한 사랑만으로도 이미 기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자랑할 수 없게
주님이 주시는 해방과 구원은 공동체를 통해서 온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과 구원을 분리했다. 그리고 해방을 버렸다. 그 결과 구원은 세상에 있는 동안 피상적인 것이 되어 죽음 이후로 그 시기를 늦춰야 했다. ‘사후 천국’이 교리로 공고화되면서 해방은 더 이상 복음의 요소로서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며칠 전 한 목사님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엘 갔다. 아주 작은 카페였고, 나이 드신 여성이 사장이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그분에게 모두 들렸다. 그분이 옆 테이블에 차 한 잔을 들고 와 앉아서 책을 읽다 우리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분의 딸도 우리 딸이 나온 대학을 나왔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목사님의 아내와 그 여사장님과 내게 공통점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얼마 동안 그분과 대화가 이어졌다. 카페에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꽂혀있는 책들은 그분과 그분의 딸이 본 책들이라고 했다. 그분은 자
얼마 전 내 글에 달린 댓글에 “스스로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를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그냥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평생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물론 그것이 지금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누구도 이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이도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복음에 충실하다.“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사실 이 말
불가능한 교회를 항하여(For A Church to come)새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내겐 새로운 목표나 바람은 없다. 내 목표는 교회다. 교회는 불가능하다. 나는 그 불가능을 향해 달려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길에는 완성이나 성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가 설정될 수가 없다. 물론 소제목처럼 작은 목표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라는 목표를 향한 디딤돌로서 성취가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내겐 새로운 목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내가 목적으로 삼고 있는 교회는 교회인 사람들의 공동체다. 얼마 전부터 [
오늘 아침 내가 읽은 내용 가운데 머릿속에 남은 내용이다. 이 기사는 시노드에 관한 내용이었다.교회 안에서 시노드라는 단어가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인가?그것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조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조직이 되는 순간 권력이라는 것이 함께 생긴다. 조직은 권력의 탄생을 의미한다. 교회는 서기 이백 년 경 이미 조직으로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밀란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 안에서 조직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조직으로서의 교회는 복음을 담지할 수 없다.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권력이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경쟁 속
아는 분이 내게 문화카드를 주었다. 일 년에 십일만 원을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여러 이용처가 있지만 그것을 찾아 사용하기가 내겐 수월치 않다. 그래서 손쉬운 방법으로 책을 산다. 연말까지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서점에 책 몇 권을 부탁하고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찾으러 갔다. 책 몇 권을 더 사야 해서 서점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다. 간신히 몇 권을 골라 십일만 원을 채웠다.정말이었다. 기독교 서점에 내가 읽을 책은 없었다.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책들은 읽을 책들이 나오는 곳이지만 그곳에
총회에서 법률자문을 하던 동기 목사가 있다. 그가 나에게 한 말이다. 총회장 목사를 만나려면 돈을 주어야 한단다. 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매우 짧은 시간에 이백만 원이란다. 그 말을 하면서 동기 목사는 총회가 그런 곳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익히 알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이런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을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을까? 그러나 여전히 많다. 대부분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불경한 일이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참 웃기는 현상이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내가 쓰는 글을 보고 내가 올곧은 사람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한다.나는 오래도록 글을 써왔다. 내가 쓰는 글은 옳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올곧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올곧은 사람이 아니다. 올곧게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내게 다가왔던 사람들이 몇 사람도 아니고 일부도 아니고 거의 모두가 나를 떠나거나 나와의 관계를 끊는 것에서 알 수 있다.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던 것은 내가 올곧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나를 떠나거나 버리는 이유는 내가 올곧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피아 대성당은 튀르키에 이스탄불에 있는 성당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창건했다. 404년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옛지명)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성 소피아 성당이 잿더미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집권 5년째 되는 532년에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고 황제의 자존심을 걸고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제국 각처에서 자재를 운반해 왔으며, 지난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화재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성당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교회 건축은 민심(民心)과 상관없이 황제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었다. 537년에
나는 어제 하나님과 인간과 맺은 계약(언약)에서 그 계약의 성취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전제가 있다.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신학이 하나님의 신관이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 이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그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교리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인간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 나는 언제나 이 사실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