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경쟁의 체제에 돌입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인간은 이기는 것이 진리라는 세상의 복음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은 현실 그 자체다.

손자가 지난 일 월 세 번째 생일을 지났다. 녀석은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열중한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자신의 관심을 표하곤 한다. 최근 녀석이 축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축구를 틀어달라고 하여 그것을 얼마간 보더니 빈 물병을 가져다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화장대를 골대라고 하면서 자신이 골키퍼라며 물병을 차라고 한다. 그러는 것이 신기해서 녀석과 빈 물병으로 축구를 했다. 내가 빈 물병을 몰며 녀석의 발이 닿지 않게 했더니 갑자기 녀석이 물병이 아니라 내 발을 밟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행동이었다. 이기려는 것이었다.

이미 녀석에게 경쟁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기려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늘 녀석에게 “잘 한다”라는 칭찬을 한다. 녀석은 그 칭찬들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비교하고 우월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어쩌면 경쟁이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가장 핵심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인간의 한계 그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복음일지도 모른다.

경쟁하는 두 인간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극한 대결을 거쳐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극한 대결 없이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물론 인간의 경우에는 동물들과는 달리 물리적인 힘 이외의 여러 다른 요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단순화하면 그것은 힘이다.

공원에 가서 운동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다가와 내게 나이를 묻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속성이기도 한 이 일은 나이를 매개로 힘의 관계를 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이를 묻지 않고 묻더라도 그것을 힘의 관계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시작은 힘의 비교로 시작한다. 이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이 일을 행한다. 나는 이 일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복음 역시 이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교 이후의 행동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복음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사도요한이 살아있을 때 쓰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클레멘트의 첫 번째 편지에는 이미 구약의 의식에서 빌려온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이 나타나고 있다. 197년에 기록된 터툴리안의 작품에는 죽은 자와 유아에게 침례를 베푸는 관행이 번지는 사태를 비판하고 있다. 2세기 초에 이미 침례를 받음으로 중생한다는 교리가 확산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단의 탄생과 그 과정”에서 인용)

나는 이 사실이 세상의 관계가 다시 하나님 나라이어야 할 교회 안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별이 되고 성직자가 평신도를 지도하는 것은 완전한 세상의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성직자가 평신도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도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평신도를 섬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감고 아웅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안의 섬김을 지배와 동일한 단어로 만들었다. 세상의 복음이 다시 복음을 잠식한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그 가장 상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 결과가 다르다. 평신도가 성직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성직자를 섬긴다. 그리고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라는 의미이다. 성직자는 평신도가 원하는 대로 두 팔이 벌려져서 묶이고 끌려가야 한다. 그곳이 지옥이라도, 죄악의 구렁텅이일지라도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이처럼 극한 경우로 치닫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사랑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내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사랑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차별이다. 그런 차별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명시적으로 등장할 수 없다. 물론 암암리에 그런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신뢰의 관계가 된다.

정리하면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일어나는 경우라도 그것은 신분의 차이나 계급이 아니라 다만 책임과 희생을 위한 섬김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 그런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런 차별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그것을 섬김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늘 원로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에 육신의 건강이 허락되는 한 교회의 사찰로 일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교회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든 그것을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희생의 자리에 앞장을 서는 일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사랑은 이런 일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한 번 상상을 해보라. 타이타닉호의 침몰의 상황을 상상해보라. 당신은 누구를 구명보트에 태울 것인가. 만일 우리 식구가 모두 그 배를 타고 있다면 나는 손자와 그 아이의 엄마인 딸을 먼저 타게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아내를 타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한 후에도 빈자리가 있다면 나도 탈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이렇게 할 것이다. 내게 이런 순서가 자연스러운 것은 내가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나타난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 안의 사랑이 식거나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이 식거나 실종된 교회가 오늘날 교회의 전형典型이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사랑이 실종되었다면 그곳은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나타난 현상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결국 이 사랑으로 판가름 될 것이다. 그 사랑은 사람들의 관계를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신뢰의 관계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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