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교적 방법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방법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고 있다.

한 고승이 토굴에서 도를 닦고 있는데 똑똑한 사람이 찾아와서 ‘그렇게 수행만 하는 것은 인생 허비 아니냐?’고 묻자 “왜 길고 큰 살림을 금생(이번 생)의 살림으로만 한정하느냐? 성불해서 중생을 도울 지혜만 갖출 수 있게 된다면 천생 만생을 들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고해 중생들이 있을 것이다. 남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참! 여유 있어 좋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옆에 있는데 “왜 돕지 않느냐?”는 질문에 “돈을 많이 벌어서 크게 도우면 될 터인데 뭐가 급하냐?”하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나는 도는 닦는데는 토굴에서가 아니라 총알이 날아들고 생사가 촌각에 달린 전쟁터 보다 적당한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월남전에서 약소한 전투를 해 본 사람으로서 생사가 달린 전투처럼 냉정을 필요로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체험했다. 전투에서 감정에 들떠 행동하다가는 남보다 먼저 총알을 맞을 수가 있다. 치열한 전투일수록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므로 삶의 전쟁에서도 어떻게 하면 냉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최선의 과제이다.

여기서 냉정함이라 흥분하지 않는 차가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술 마시고 코를 골고 자고 있는데 이브가 조심스럽게 갈비뼈를 세어 보았다. 혹시 딴 곳에 여자를 만들어 놓지 않았나 하고.....왜냐하면 신이 흙으로 아담을 만들다 나머지 부스러기로 이브를 만든 게 아니고 에덴 의료보험에 따라서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브의 의심은 나름 합리적이다.

신에게 전능한 능력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합리성이 있는 것이다. 합리성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덕목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감정과 합리적 이성을 넘는 기능이다. 

세상에는 어렵게 말하면 못 알아 듣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쉽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예수나 부처는 쉬운 말로 이야기했지만 철학자들은 어려운 말로 이야기 한다. 나는 예수 부처의 쉬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려운 철학책을 뒤적이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왜 그럴까?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깨달음이 없어도 논리만 쫓으면 된다. 그러나 경전을 몸으로 깨달으며 읽는 즐거움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유튜브에서 제 스님이 설법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한 마디로 진제 스님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구도자들은 세상의 복잡함에서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깨달음만이 길이라는 진제 스님의 논리가 지금 당장 세계 각처에서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는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깨달은 훌륭한 분이겠지만 대중들에게 나누어 줄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일말의 깨달음도 없는 목사들의 설교 공해 보다는 훨씬 영양가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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